신문에서 피고 인터넷에서 진 최진실의 추억
세상이야기모아 |
2011. 11. 1. 22:17
신문에서 피고 인터넷에서 진 최진실의 추억
【서울=뉴시스】
◇신동립의 잡기노트
최진실의 40년은 4가지로 정리된다. 여보란 듯한 가난탈출, 연예여왕 등극, 애증관계 대리인의 참변, 성공하지 못한 결혼이다.
요즘은 별미지만 성장기 최진실에게 수제비는 주식이었다. 별명도 최 수제비였다. 약을 잔뜩 먹고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로 몹시 곤궁했다. 국민학생 때부터 밥을 싸갖고 다녀본 적이 없다. 누룽지를 뭉쳐 먹었다. 급우가 도시락을 두 개 챙겨오기도 했다. 집에서는 라면이나 수제비를 먹었다. 1988년 2월 고교를 마쳤지만 졸업앨범도 못샀다.
고졸 백수로 지내다 아모레 화장품 CF 보조모델이 됐다. 출연료는 30만원이었다. 이후 한국화장품 광고에서 주연 김희애(41)를 받쳐주는 조연으로 주목받은 뒤 이응경(42)에 이어 삼성전자의 얼굴이 됐다. 1년 전속금 2000만원을 받았다. 재계약금은 4000만원으로 뛰었다.
89년 MBC TV 사극 한중록에 평양기생 단역으로 들어가며 탤런트가 됐다. 승승장구의 출발이었다. 공채 연기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샘이 집중됐지만 팬덤은 그녀를 인기절정으로 계속 밀어올렸다. 스포츠지 1면에 최진실이라는 미끼를 걸면 독자들이 마구 낚였다. 최신실 두 번 당했다라는 굵은 글씨를 보고 신문을 사 뒤적이면 그동안 최진실네 집에 도둑이 두 번 들었다더라는 식이다. 속는줄 알면서도 최진실이라는 이름만 박으면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은 팔렸다.
최진실의 앞길에 걸림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악역을 자처한 해결사가 있었다. 94년 살해당한 학원 명강사 출신 매니저 배병수(당시 37세)다. MBC TV 폭풍의계절 극중 비중이 김희애 쪽으로 기울자 그는 멀쩡한 최진실을 입원시켰다. 동시에 드라마 촬영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독일에서 이 드라마 녹화를 마치고 귀국하는 최진실이 이코노미 클래스 항공권을 끊고 1등석에 앉아왔다고 고발하는 투고가 신문에 실렸다. 배병수는 민첩했다. 자기가 우겨서 그리 됐을뿐 최진실은 무고하다고 강변했고, 사건은 해결됐다. 수익배분 문제 등으로 끝은 안 좋았다. 그래도 배병수가 최진실 탄생에 한 몫 크게 했다는 사실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2000년 최진실은 패션모델급 야구스타 조성민(35)과 식을 올렸다. 박찬호(35)를 능가하는 투수였다. 서른을 넘긴 최진실보다 돈도 더 잘 벌었다. 다섯 살이나 젊은 데다 능력도 걸출한 조성민과 부부로 맺어진 최진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따낸 듯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만 편애하지 않았다.
상큼하면서도 눈밑 그늘이 가시지 않았던 최진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무엇이 163㎝ 40㎏ 남짓으로 그녀를 갉아 먹었는가도 알 수 없다. 자살한 영혼은 저승도 안 받아준다고 한다. 최진실 만큼은 예외다. 그 곳을 다스리는 신은 남자일 터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다.
최진실은 더 이상 없다. 그녀가 남긴 아들(8)과 딸(6)은 썩 눈에 띄게 자랄 것이다. 원조 국민요정 최진실은 앞으로도 수십년 동안 페어리 테일의 주인공으로 회자될 수밖에 없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흔살, 참 보기 좋은 이미지로…. reap@newsis.com

【서울=뉴시스】
◇신동립의 잡기노트
최진실의 40년은 4가지로 정리된다. 여보란 듯한 가난탈출, 연예여왕 등극, 애증관계 대리인의 참변, 성공하지 못한 결혼이다.
요즘은 별미지만 성장기 최진실에게 수제비는 주식이었다. 별명도 최 수제비였다. 약을 잔뜩 먹고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로 몹시 곤궁했다. 국민학생 때부터 밥을 싸갖고 다녀본 적이 없다. 누룽지를 뭉쳐 먹었다. 급우가 도시락을 두 개 챙겨오기도 했다. 집에서는 라면이나 수제비를 먹었다. 1988년 2월 고교를 마쳤지만 졸업앨범도 못샀다.
고졸 백수로 지내다 아모레 화장품 CF 보조모델이 됐다. 출연료는 30만원이었다. 이후 한국화장품 광고에서 주연 김희애(41)를 받쳐주는 조연으로 주목받은 뒤 이응경(42)에 이어 삼성전자의 얼굴이 됐다. 1년 전속금 2000만원을 받았다. 재계약금은 4000만원으로 뛰었다.
89년 MBC TV 사극 한중록에 평양기생 단역으로 들어가며 탤런트가 됐다. 승승장구의 출발이었다. 공채 연기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샘이 집중됐지만 팬덤은 그녀를 인기절정으로 계속 밀어올렸다. 스포츠지 1면에 최진실이라는 미끼를 걸면 독자들이 마구 낚였다. 최신실 두 번 당했다라는 굵은 글씨를 보고 신문을 사 뒤적이면 그동안 최진실네 집에 도둑이 두 번 들었다더라는 식이다. 속는줄 알면서도 최진실이라는 이름만 박으면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은 팔렸다.
최진실의 앞길에 걸림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악역을 자처한 해결사가 있었다. 94년 살해당한 학원 명강사 출신 매니저 배병수(당시 37세)다. MBC TV 폭풍의계절 극중 비중이 김희애 쪽으로 기울자 그는 멀쩡한 최진실을 입원시켰다. 동시에 드라마 촬영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독일에서 이 드라마 녹화를 마치고 귀국하는 최진실이 이코노미 클래스 항공권을 끊고 1등석에 앉아왔다고 고발하는 투고가 신문에 실렸다. 배병수는 민첩했다. 자기가 우겨서 그리 됐을뿐 최진실은 무고하다고 강변했고, 사건은 해결됐다. 수익배분 문제 등으로 끝은 안 좋았다. 그래도 배병수가 최진실 탄생에 한 몫 크게 했다는 사실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2000년 최진실은 패션모델급 야구스타 조성민(35)과 식을 올렸다. 박찬호(35)를 능가하는 투수였다. 서른을 넘긴 최진실보다 돈도 더 잘 벌었다. 다섯 살이나 젊은 데다 능력도 걸출한 조성민과 부부로 맺어진 최진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따낸 듯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만 편애하지 않았다.
상큼하면서도 눈밑 그늘이 가시지 않았던 최진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무엇이 163㎝ 40㎏ 남짓으로 그녀를 갉아 먹었는가도 알 수 없다. 자살한 영혼은 저승도 안 받아준다고 한다. 최진실 만큼은 예외다. 그 곳을 다스리는 신은 남자일 터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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